낙태를 둘러싼 논쟁들과 로 대 웨이드 판결의 의미
미국의 법 체계
우리나라에서 법원이 판결을 하면 비슷한 쟁점을 다투는 하급심의 재판들을 사실적으로만 기속하지만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기속한다. 우리나라에서 법원의 판결은 원칙적으로 해당 사건에 대해서만 효력을 지닌다. 2심의 판결을 대법원이 부정하여 다시 2심으로 판단하라고 내려보내도 2심에서는 다시 대법원의 판결과 다른 원래의 판결을 고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논리적으로 가능할 뿐 사실적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다르다. 특정 재판의 결과는 같은 심급 이하의 모든 재판에 규범으로 작용한다. 불문법 국가라 그렇다.
낙태 금지의 보호 법익
낙태를 법으로 금하여 얻는 주된 법익은 태아의 생명이고 부차적인 법익은 어머니 신체의 온전함이라는 게 통설이다. 낙태를 한 여자는 불행해지므로 이를 막기 위해 낙태를 법으로 금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너무 주관적이고 추상적이어서 법적으로 논할 수준의 가치는 없다. 따라서, 반대로 낙태를 한 여자들이 더 잘 살게 되더라는 논거도 낙태를 법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의 논거로는 부족하다.
낙태는 분명하게 생명을 침해하는 행위이지만 이러한 생명은 독립적인 그것이 아니라 위 통설과 같이 어머니의 권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비록 2차적인 권리의 주체라 할지라도 어머니의 의사 역시 이 행위가 범죄를 구성하는지 여부를 따지는 데에 있어 고려되어야 한다.
낙태 허용 여부를 둘러싼 논란들
2018년 노동자연대라는 단체는 국제연합이 우리나라에게 낙태를 법으로 허용하라는 권고를 했는데 문재인 정부가 이를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건 틀린 주장이다. un에는 인권위원회가 있는데 이 위원회는 특별한 권한을 위임mandate하여 Independent Expert on human rights and international solidarity 즉 ‘인권과 국제 연대를 위한 독립된 전문가 집단‘의 활동을 보장한다. 이들의 입장은 곧 un의 입장이라고 보면 된다. 이들 독립 전문가들은 태아에게 치명적인 장애가 있는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산모의 낙태 결정권을 인정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태아의 생명을 존중하여 낙태를 금하는 것은 뿌리 깊고 보편적인 인류 공통의 정서다. 유태교 경전인 그 옛날의 구약 시편 127편 3절에도 태아는 야훼가 주신 선물이자 상賞이라고 나와 있다. 대부분의 문명 국가들에서 낙태는 원칙적 금지, 예외적 허용이다.
로 대 웨이드 판결
낙태를 법으로 허용할 건지 여부에 대한 다툼이 미국을 광풍처럼 쓸고 지나갔다. 현대 사회의 법은 대체로 사람들의 자유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변해 가고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roe v. wade 판결을 엎은 이번 미국 연방 대법원 판결은 좀 의외였다. 법 논리가 수십 년 이어져 왔으면 그 안정성은 탄탄한 것이지만 트럼프 정부 때 공화당 성향의 연방 대법관들 수가 늘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 흔히 이들의 성향을 보수적이라고들 하는데 保守란 ‘지킨다’는 뜻이다. 새롭게 바꾸기보다는 기존의 질서를 존중한다는 게 보수의 덕목이다. 보수와 진보라는 단순한 개념적 구별이 얼마나 무의미한 건지 이번 판결이 제대로 보여줬다.
roe는 ‘여자 아무개’ 정도로 이해하면 되고 wade는 당시 다툼이 있었던 댈러스 카운티의 district attorney인 henry wade다. 미국 판례는 이렇게 ‘누구 대 누구’라는 사건 이름으로 흔히 칭해지며 그 뒤에 자세한 숫자들이 판결 번호로 붙는다. 형사 사건 같은 경우에는 ‘people … v. 아무개’ 식으로 된다. 앞에 나오는 게 원고다. 로 대 웨이드 사건은 우리로 치면 위헌법률심판이었다. district attorney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지방 검사’라고 나오는데 이는 틀린 번역이다. 흔히 줄여서 da라 하는 district attorney는 검사장이다. 그냥 지방 검사들은 prosecutor라고 한다. 웨이드가 검사장으로서 텍사스 주 정부를 대리하여 소송에 임했던 사건이다. 우리나라에서 통합진보당을 해산해 달라며 위헌정당해산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했을 때 원고가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황교안이었던 거랑 비슷하다. 웨이드가 대리한 텍사스 주는 주 법원에서 패소하여 연방 대법원에 항소했는데 여기에서 또 지며 역사에 길이 남는 판례의 주인공이 됐다.
돕스 대 잭슨 여성건강기구 판결
미국 연방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건 구체적으로는 돕스 대 잭슨 여성건강기구 사건에 대한 판결의 결과이다. 이 사건은 낙태 시술을 하는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과 그 소속 의사가 미시시피 주 정부의 공무원인 thomas e. dobbs 등을 고소한 거다. 주 정부는 15주 이하의 태아에 대해서만 낙태를 허용하는데 위 클리닉은 16주까지 시술을 하며 충돌을 했다. 낙태 시술 대상 기간을 한 주 더 늘리려다 역사적 헌법 판례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1심에서는 피고 즉 주 정부 측이 졌고 이들이 항소하여 연방 대법원까지 왔다. 헌법재판소가 따로 없는 미국에서는 연방 대법원이 헌법심판을 한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여자가 자신에 의지한 생명을 없앨 권리를 헌법이 부여confer했다 볼 근거는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면 이제 주 의회가 낙태를 급지하는 법을 만들어도 이게 위헌은 아니므로 적어도 이 부분에 한해서만은 적법 절차를 부정할 근거는 사라진다.
이 사건이 일어난 미시시피도 텍사스처럼 남부 지역에 속한다. 이들 모두 그 위치나 정서가 우리나라의 경상도쯤 되는 공화당의 텃밭이다.
판례 변경의 의미
우리나라의 뉴스들을 보면 미국의 대법원이 낙태권을 폐기했다는 표현들이 많은데 이는 틀리다. 미국 연방 대법원의 이번 판례 변경은 임신한 여자의 낙태할 권리는 헌법이 보호한다는 기존 판결을 그렇지 않다고 확인한 거다. 낙태가 헌법적 권리가 아니라고 낙태를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따라서 각 주는 유권자들의 뜻을 물어 법을 만들거나 고쳐 낙태 시술 여부를 결정하면 되는 거다. 전에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었다면 이제는 각 주가 알아서 결정하면 되는 사안이 된 거다.
특히 혼돈하기 쉬운 건 이 판결이 인정한 헌법적 권리가 뭐냐 하는 거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신체의 자기 결정권일 거 같지만 아니다. 적법 절차due process of law에 따른 프라이버시권privacy權, right to privacy이다. 미국의 수정 헌법 제14조 제1항은 주 정부가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헌법은 여자가 낙태할 권리를 보장하는데 주 정부가 이러한 헌법적 권리를 침해하며 낙태하려는 여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적법 절차에 따른 게 아니라는 거다.
판례 변경 이후
위에 설명한 거와 같이 이번 판례의 변경은 법으로 낙태를 금하는 게 전혀 아니므로 여러 주들은 잰걸음으로 낙태에 대한 법을 정비하고 있다. 주민州民 투표를 통해 낙태를 허용하도록 법을 제정한 주도 당연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