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잘 하시는 스님들
보현 스님이라는 분이 유튜브 요리 채널을 운영하는데 구독자 수가 40만을 넘는다. 어느 스님은 넷플릭스에도 나왔다던가 한다.
부처는 식물의 씨앗이나 곡식을 따지 않았고 하루에 한 번 낮에만 걸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디가 니까야, 브라흐마잘라 숫따 1.10.] 또한 그는 수행자의 소유를 원칙적으로 금했고 예외적으로 옷, 신발, 지팡이 같은 것들만 허용했다. 오늘 먹을 건 오늘 구걸해서 먹고 적선이 없으면 굶었다. 내일 먹을 소금조차 미리 챙기지 못하게 했다.
청해무상사라는 도 닦던 베트남 여자가 있었다. 아마 지금도 영업하고 다닐 거다. 이 사람이 오래 전 우리나라에 와서 신문 광고를 하며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던 적이 있었다. 無上士란 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깨달음을 얻은 부처라는 뜻이다. 당시 나는 현장에 없었지만 참여했던 사람의 말을 전해 들어 보니 그 사람은 시작을 하기 전에 우선 요식업 종사자들은 자기의 불력으로도 도움을 줄 수 없으니 나가 달라고 했단다. 칼로 먹고 사는 사람은 그 이용의 대상이 동물의 살이든 식물의 줄거리든 수행자로서 적합하지 않단 말일 테다.
음식을 한다는 건 보기에 따라 무척 형이상학적인 행위다. 우선 무언가를 반드시 소유해야 한다. 그런 뒤 날카롭게 벼린 칼로 생명을 빼앗던지 최소한 생명을 빼앗긴 주검을 자르고 끊고 해야 한다. 누군가는 이를 즐거운 마음으로 하겠지만 의식을 바로 세우고 이 행위를 찬찬히 들여다 보면 결코 예삿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tv에 나오는 유명한 요리사들 가운데 날카로운 인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드문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걸식을 수행의 중요한 과정으로 삼은 부처의 가르침에는 깊은 뜻이 있다. 굳이 자기 손에는 피 묻히지 않겠다며 백정을 시켜 동물을 잡고 정작 본인은 그걸 맛있게 먹으면서 그런 사람들을 천하게 여기고 대하는 것은 저열한 의식이라는 가르침이다. 남을 시켜 요리를 하게 하는 것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업을 쌓는 건 마찬가지이며 이러한 의식과 논리의 끝에는 일체 먹지 말던지 최소한으로 남이 주는 거만 먹던가 하게 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보면 바다에서 청새치를 낚는 장면이 나온다. 부부로 보이는 청새치들 가운데 암컷을 낚아 끌어 올리는데 그 주변을 수컷이 애처롭게 맴돌았다는 얘기다. 동물은 먹이가 생긴 때 암컷이 먼저 먹도록 배려를 한다는데 수컷의 이런 마음 때문에 암컷이 먼저 걸려든 거였다. 암컷을 따라 배 앞까지 다가온 수컷은 마지막으로 제 짝을 보려는 듯 수면 위로 높이 솟아 아름다운 지느러미를 펼쳐 보인 뒤 바다 밑으로 사라졌다고 노인은 말한다. 그는 그 광경이 살면서 본 가장 큰 슬픔이라며 자기를 돕던 아이와 함께 용서를 구하고 칼을 든다.
입을 통해 배를 채운다는 행위 자체가 이렇게 그 자체로도 업을 쌓는 것이다. 그 행위가 더욱 적극성을 띠어 취하고 썰고 그것도 모자라 과시하고 싶어지기까지 하면 그 업의 무게는 더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