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의 차이와 이해
소승 불교는 중이 수행을 하여 저 혼자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되는 거고 대승 불교는 行者가 깨달은 뒤에도 뭇사람들 역시 그 바다를 건너게 돕는 걸 가치로 삼는 거라 아는 사람들이 많다. 틀린 이해다.
니까야에는 부처가 재가자들에게 불법을 전한 사례들이 많다. 부처는 우리 빅쿠들만 열반에 들자고 가르치지 않았다. 부처가 도를 들은 이후의 40~50년 삶 자체가 衆生濟度였다.
더 많은 사람들을 태운다는 뜻인 大乘은 상대를 낮추려는 의도로 지은 이름이다. 소승과 대승이 아닌 빠알리 불교와 한자 불교 또는 인도 불교와 중국 불교로 나누어 부르고 이해하는 게 맞다.
신약의 공관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의 말과 행동이 조악하게 여겨지는 부분들이 있다. 예수가 죽은 뒤 바울로가 쓴 로마서에서는 공관 복음서의 주장과 논리가 보다 다듬어지고 보편적으로 진화한 걸 알 수 있다. 불교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니까야에 기록된 부처의 말과 행동에는 우리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이 많다. 분신술은 기본이고 온갖 허무맹랑한 도술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면서도 막상 그게 다 진짜냐고 물으면 자기는 그런 거로 불법을 펼치지는 않는다며 발을 뺀다.
께왓다야 제자들을 시켜서 ‘하얀 옷을 입은 재가자들에게 가서 초능력과 기적을 보여주거라’ 하며 담마를 가르치는 건 내 방식이 아니다.
디가 니까야, 께왓다 숫따 1
怪力亂神은 믿지 않는 공자의 나라에서 저런 니까야의 내용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 중국 사람들 허풍이 우리의 그것보다는 세지만 인도 사람들한테는 깜도 안된다. 구약의 야훼와 모세 구라도 인도 구라에는 택도 없다. 儒者들이 그것도 500년은 족히 지나 들어온 부처의 말을 개 짖는 소리로 들었을 건 당연하다.
중국 불교에는 저렇게 원시적인 인도 불교의 한계를 순화한 공이 분명히 있다. 니까야에 분명하게 기록된 많은 문제적 내용들을 없었던 거로 할 수야 없었지만 다른 것들로 덮었다. 그렇다고 로마서가 공관 복음서들보다 위에 있거나 더 큰 가르침이라 볼 수 없듯이 중국 불교가 인도 불교보다 그러한 것도 아니다. 인도 불교와 중국 불교의 관계는 구약과 신약의 그것과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