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들이 농사짓고 요리하는 거는 자랑이 될 수 없다

샤스타 대이지라는 식물을 화분에 기르고 있다. 씨앗을 사다 뿌려 싹을 틔웠다.

왜 그런진 모르겠는데 화분의 가상다리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숟가락으로 땅을 퍼서 가운데로 옮겨야 하나 망설였지만 자라는 게 영 신통칠 않아 가운데에 분명하게 다시 몇 톨을 박고 새로 싹을 틔웠다. 그렇게 조그만 화분에서 두 주가 자라고 있다.

문제는 매가리 없이 크던 가상다리의 줄기가 굵어지면서 제대로 크기 시작했다는 거다. 나중에 심은 가운데는 영 맥을 못춘다. 가운데 꺼를 뽑고 가상다리 꺼의 뿌리가 더 뻗기 전에 애당초 생각했던 거처럼 뿌리째 떠서 가운데로 옮겨야 하나 고민만 하면서 시간은 흐른다.

쉽지 않은 결정이다. 안 그래도 좁은 화분에 눈치 없이 자라는 잡초의 싹이야 그렇다 쳐도 내가 손수 뿌린 씨앗에서 난 생명을 내가 뽑아내 죽이는 건 부처의 말을 굳이 가져다 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저어된다.

이렇게 예쁜 화분 가꾸기는 망한 거 같고 나의 마음은 반쯤 방치인 상태고 애들은 점점 불쌍해지고 있다. 볼 때마다 심란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나는 저들 둘을 그냥 두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직접 농사지어 먹는 중들이 많다. 이들 가운데에는 요리를 잘 한다고 이름을 떨친 중들도 있다. 뭐 대단한 수행이라도 되는 양 하지만 보기 힘들다. 생명을 가꾸는 일이야 숭고한 것이지만 수확과 요리에는 업이 쌓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불교 이론을 가져다 풀지 않아도 마음이 안다.

수십 년 칼질한 일식 요리사들 가운데 눈매 날카롭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농사 짓고 요리하는 중들 인상에서 인자한 느낌을 받기 힘든 것도 같은 이유다.

오래전 베트남의 청해무상사라는 자칭 부처는 우리나라에 와 사람들을 만난 자리에서 음식점을 하는 사람들은 나가달라는 말부터 했다. 자신의 불력으로도 요리하는 사람들의 업은 풀 수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며칠에 한 번씩 숫돌에 칼을 갈아 벼리고 대부분의 식사를 직접 요리하여 챙겨 먹는다. 잘 선 날은 나무 도마에 박히다시피 파고든다. 그런 칼로 긴 파의 뿌리를 잘라내고 몸통을 나눈다. 죽은 동물의 살덩이를 예리하게 그어 벌린다. 먹는 거나 좋지 그래서 나는 요리가 즐겁지 않다. 나는 그런 과정에 업이 쌓이는 걸 선명하게 느낀다.

업은 산 동물을 죽일 때에만 쌓이는 게 아니다.

부처가 괜히 과일조차 따먹지 않고 구걸하며 살다 갔는지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