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진아, 참나, 자아, 아상의 차이
고따마 싯닷타는 브라마니즘 시대의 사람이다. 윤회라는 개념은 이미 바라문교에 있었다. 누군가가 죽고 태어나는 걸 반복한다면 이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코끼리가 죽어서 사람으로 태어난 경우 그 코끼리가 철수로 태어난 건지 영희로 태어난 건지 구별할 수 있는 identity가 있어야 한다. 이걸 산스끄리뜨로는 atman이라 한다. 따라서 아뜨만은 찾고 말고 긍정하고 부정하고 하는 게 아니다.
아뜨만에 대응하는 빠알리 단어는 atta이다. 언어적으로 대응한다고 개념적으로 같은 건 아니다. 영국 사람들은 앗따를 oneself로 번역했으니 이걸 우리말로는 자아라 하는 게 맞겠지만 ego가 제일 맞는 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고는 프로이트가 설명한 것과는 다르다.
싯닷타는 나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아를 둘이라 했다. 하나는 느끼고 행동하는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자아를 인식하는 자아이다. 전자가 앗따, 이고, 我相이며 후자가 참된 나, 참나, 眞我이다. 전자를 그냥 자아라고도 한다. 따라서 앗따는 윤회에 대한 개념인 아뜨만과 다른 것이고 아뜨만이 참나인 것도 아니다. 참나는 찾는 것이 아니고 그 존재를 인식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이고를 분리하여 볼 수 있으면 그거로 족한 것이다. 이걸 見性이라 한다.
아난다야, 빅쿠가 자아를 느낌이라 여기지 않거나, 느껴지는 것이라 여기지도 않거나, 느껴지는 것이면서 느끼는 것이라 여기지도 않으면 그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얽매인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디가 니까야, 마하니다나 숫따 32.
소승과 대승을 묻지 않고 앗따는 버려야 할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느끼거나 판단하지 말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사라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