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아픈 부모를 모신다는 것

“항암 때문에 엄마 머리카락 빠지기 전에 가족사진을 찍자.” 동생 에이치(H)가 남매 단체대화방에 글을 올렸다. 그 메시지에서 나는 ‘죽음’을 느꼈다.
– 소소, 한겨레 2023. 3. 4.

한겨레에 소소라는 분이 몸에 암을 갖고 계신 어머니를 간병하는 얘기를 싣고 있다. 어머니에게는 자식들이 넷이나 있는데도 간병은 버거워 보인다. 드라이한 글이지만 고따마 싯닷타가 그토록 한 말 또 하며 벗어나라 했던 고통이 엑기스로 발산된다. 많은 국뽕 유튜버들이 떠드는 것과 달리 우리 공동체의 의료 시스템은 감기나 충치 환자, 아니면 기껏해야 맹장수술 받는 사람들에게나 위대하지 죽을 병에 한번 걸려 보면 생지옥이 따로 없다는 걸 바로 알게 된다. 칼럼니스트의 글이 무거운 건 그녀가 긍정적 낙관론자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처지가 과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 모두에게서 학대를 받으며 자란 나는 부모와 연락을 하지 않고 산 세월이 꽤 된다. 그들이 죽는다는 건 내겐 그저 지구에서 60kg 정도의 쓰레기가 줄어드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연히 나는 걱정도 부채 의식도 두려움도 전혀 없다. 세계에서 행복한 정도가 고작 50 몇 위에 불과한 우리 공동체에서 아픈 부모를 보살피며 사는 사람들을 보면 어릴 적 겪은 고통을 나는 이렇게 보상 받는구나 싶은 생각을 더러 한다.

고통을 함께 할 사람도 없고 애틋하게 그리워할 사람도 없다는 게 과연 좋기만 한 걸까 솔직하게 확신까진 들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과의 즐거웠던 지난 기억을 떠올리면 현재의 고통을 견디는데 도움이 된다는데 내게 그런 건 없다. 그래서 간병할 사람도 없는 나 역시 삶이 그렇게 무겁기만 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