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삶 – 경향신문 김민섭

아내에게는 이 차 당신 거야, 라고 말하며 차키를 주었다. 그는 스틱 차량을 10년 넘게 몰던 사람이었다. 얼마나 비싸게 주고 사온 것이냐고 해서 35만원이라고 하니 잘했다고, 그간 받은 선물 중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요즘 아내는 전화하면 밖에 조금 더 있는 듯하다. 그간 어디 가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 차는 동네의 좁은 골목길을 갈 수 있고 어디든 주차할 수 있다고 한다. 얼마 전엔 초등학생 아이들이 우리 차는 왜 이렇게 작냐고 불평해서 한마디 하려 하자, 그는 이 차가 너희 휴대폰보다 싼 것이라고 하며 웃었다. 아이들은 그런 차가 어디 있느냐며 거짓말 말라고 함께 웃는다. 그래, 이러한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이러한 삶의 방식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닮아가는 아이들을 보는 것. 괜찮은 삶이 아닌가.
– 김민섭, 경향신문 2023. 11. 24.

전국 여기저기를 다니며 강의를 하러 다니는 위 필자는 이동을 할 때 탁송 콜을 받아 움직인다고 한다. 폐차장으로 탁송을 하던 중 차가 아까워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여 인수한 뒤 아내에게 선물을 했다는 내용의 칼럼이다.

위 칼럼이 실린 이튿날 친하게 지냈던 직장 동료가 갑작스레 일을 그만두었다. 왠지 글을 읽다 그녀가 떠올라 전해 주고 싶었는데 말이 친한 직장 동료지 서로 연락처도 모르던 사이라 카카오톡으로 기사의 링크를 보낼 수도 없고 해서 글을 오려 뒀다.

요 며칠 인연이라는 게 정말 있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 보고 있다. 아마도 그런 건 없지 싶다. 인연이나 운 같은 게 삶의 한 장을 마무리하는 거처럼 보일 때도 더러 있지만 관찰의 시간을 길게 놓고 보면 결국은 노력이나 긴 삶의 내력이 만들어낸 결과다.

오래전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힘겹게 살던 아들이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어머니를 버리고 깨달음을 얻겠다고 집을 나와 선사를 찾아 헤맨 이야기를 들었다. 득도를 했다는 스승을 고생 끝에 찾아 깨달음을 얻으려 찾아왔다 했더니 그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집에 큰 스승을 모셔 두고 무슨 스승을 찾아 깨달음을 얻겠다고 헤매 다니고 있느냐.”

관계의 모양과 깊이를 떠나 헤어진 동료는 그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묵직한 숙제들을 내게 던져 놓고 갔다. 사는 동안에는 풀지 못할 수도 있을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내게 큰 스승이다.

방 구석에서 혼자 몇 년 동안 컴퓨터하고만 씨름을 하며 몇 날 며칠을 말 한마디 할 일 없이 지낼 땐 나의 의식이 거의 그곳에 다다라 가는 걸 느꼈다. 세상에 다시 던져진 뒤에는 그게 착각이고 망상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홀로 앉아 마음의 평정을 이룬 듯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비록 본래의 의미는 다를지언정 십우도의 끝 장면이 저자인 걸 곱씹어 본다.

시끌벅적한 곳에서 다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말수는 점점 다시 적어지고 있다. 수행을 위한 묵언이 아니라 자꾸 스스로 세상과 담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 끝을 담담하게 외면하지 않고 직시해 보려 한다.

글은 전하지 못했다. 그 마음이 에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