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척간두진일보 오류와 원문

흔히 백척간두진일보라 하는 말은 景德傳燈錄에 쓰인 招賢大師의 게송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원문은 다르며 아래와 같다.

百丈竿頭不動人 雖然得入未為真 百丈竿頭須進步 十方世界是全身
백 길 길이 장대 위의 흔들림 없는 사람은 비록 깨달음에 분명 들어선 것이긴 하나 완전하게 벗어난 것은 아니니
그 자리에서 마침내 더 나아갈 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리라.

이미 같은 시대의 책인 오등회원에 다시 편입될 때부터 변형이 되기 시작해서 지금은 많이 달라져 전해지고 있다. 우리말 사전에 백척간두는 있어도 백장간두는 없다. 척은 발바닥 길이고 장은 사람 키 길이다. 백 척이든 백 장이든 물리적 길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니 물론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노자는 깨달음을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했지만 싯닷타 고따마는 분명하게 말했다. 고통이 영원히 사라지고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 더 이상 환생하지 않는 거라고. 이런 연유로 불가에 가르침의 뿌리를 두고 있는 일부 覺者들은 서둘러 해탈에 이르려고 남은 삶을 스스로 버리기도 한다. 성공들은 했는지 모르겠지만.

특이한 것은 이러한 깨달음 즉 열반이란 게 말 그대로 불을 훅 불어 끄듯 현상의 변화가 일도양단식으로 전개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대개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환각 비스무리한, 일상에서는 히로뽕이나 맞아야 경험함직한 희열을 느끼는 것을 시작으로 하는데 이미 어느 정도 공부가 되어 있는 사람은 이게 그거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는 모양이다. 섹스보다 강렬하다는 이런 경험은 이 생의 삶이 끝날 때까지 유지되지는 않아 짧게는 몇 분 길게는 몇 달 지속된다고 한다. 결국 다시 의식은 일상의 수준으로 돌아오지만 한번 했던 잊히지 않는 경험은 수행을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한다고들 한다.

초현대사의 가르침은 이런 과정과는 좀 다른 건데 위의 비자발적 돈오를 경험한 사람들과 달리 죽도록 평생 정진만 하여 어느 경지에 이른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일상에서도,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곳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 것이 죽기보다 싫어 ego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단지 의식과 인식을 하지 못하니 몽매하게 말하고 행동할 뿐 … 행자들은 아무래도 이런 걸 볼 수 있으니 공포를 직시하기는 좀 수월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