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편하게 타고 다니는 이준석과 비문명적이라는 장애인들
요 며칠 지하철 좌석에 앉아 옆 사람에게 기대어 자고 있는 이준석 사진이 언론에 많이 나오고 있다. 이걸 보는 우리 공동체의 장애인들 마음이 어떨까 하는 데에 자연스럽게 생각이 미쳐 마음이 무겁다.
1990년대 초반이니까 30년도 더 지난 때다. 여러 나라 친구들과 함께 밴을 타고 미국을 여행했다. 그 가운데에는 덴마크에서 온 남자가 있었는데 팔이 없이 손이 어깨에 달린 장애인이었다. 긴 셔츠를 입고 다녔으면 그냥 팔이 없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말았을 텐데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웃통을 벗고 다녔다. 그 모습은 ‘불편’했다.
한 달 가까이 그렇게 여행을 하며 나는 달라졌다. 그의 기괴한 모습에 익숙해졌다기 보다는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다른 친구들의 태도에 나는 불편한 사람들을 존중하는 자세를 배웠다.
아래의 동영상은 내가 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 콜미진의 한 에피소드다.
전국장애인철폐연대라는 단체가 있다. 이들은 장애인들인 자신들이 더 편리하게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하며 여럿이 모여 지하철을 타고 내리며 지하철의 정상적인 운행에 지장을 준다. 비록 하나하나의 행위가 합법이라 해도 이런 행위들이 고의적이고 집단적으로 이뤄져 물리적으로 다른 평가를 받을 정도의 수준에 이르면 범죄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장하는 바와 행동은 옳고 타당하며 정당하고 적법하다. 하지만 여당의 대표를 지낸 이준석의 판단에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겠다고 타인의 불편을 수단 삼는 사람들 … 얼마나 비문명적인가
– 이준석 페이스북
집회, 시위, 단체 행동 등은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게 본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헌법은 원칙적으로 이를 보장한다. 왜?
제21조 ① 모든 국민은 언론ㆍ출판의 자유와 집회ㆍ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 대한민국 헌법
약자를 보호하는 건 우리 헌법의 기본 가치이자 현대 모든 문명사회 법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제34조 ①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② 국가는 사회보장ㆍ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③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④ 국가는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의무를 진다.
⑤ 신체장애자 및 질병ㆍ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 같은 법
이준석 의식의 수준으로 보면 모든 집회, 시위, 단체 행동, 노동자들의 쟁의 그리고 위 동영상에 나오는 캐나다 스트리트카 탑승 장애인의 행위도 비문명적이다. 다른 사람들을 ‘불편을 수단으로 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참 단순하기 그지없는 사고 체계다.
사회적 약자들은 점잖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기본권을 누릴 수 없다. 애당초 그런 게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약자인 거다. 아마도 이준석은 들어 본 적도 텐데 헌법에는 저항권이라는 개념이 있다. 공권력이 공동체의 중대한 가치를 훼손할 때에는 공동체 구성원이 폭력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잘못된 걸 바로잡을 수 있다는 자연권적 권리다. 세계적으로 인정되는 다수설이며 우리 헌법재판소도 인정하고 있는 권리다. 물론 이 권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하며 우리 공동체의 장애인들이 위에 나오는 캐나다의 반에 반만큼도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 공동체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도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건 경우에 따라서는 죽고 죽이는 행위조차 정당화될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의 일은 복잡하고 입체적이며 우리의 법 논리 또한 그렇게 형이상학적이며 포용적일 수 있다는 거다.
세상에 대한 인식의 수준이 아직 미숙했던 어린 나의 첫 미국 여행 뒤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제는 많은 젊은이들이 세상을 더 자유롭게 보고 배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친구들이라면 의아해할 거다. 왜 우리 주위에는 그토록 장애인들이 적은지.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라도 법 논리를 확장하여 약자와 소수자들을 배려하려 노력해도 법을 만드는 사람들의 수준이 국개의원 소리나 들을 정도라면 답은 없다. ‘다수의 불편’이라는 초딩 수준의 단세포적인 잣대로 약자들의 삶을 재단하려 드는 여당 대표, 국회의원의 안목이 곧 우리 공동체의 불행이다. 사람은 누구도 완벽하지 않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도 있는 게 사람이다.
여러 명의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질서정연하게 지하철에 ‘탑승’하는 것이 이들이 하는 시위다. … 이 대표가 비판을 시작한 계기가 된 사건이 발생한 지난 24일 나도 충무로역에 있었다. 이 대표가 말한 그 ‘볼모’였던 셈이다. 지하철이 연착돼 역사 내부는 붐볐고 소란은 있었지만 결코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많은 시민이 묵묵히 자기 몫의 불편을 감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많이 성숙했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 갈등을 조정하는 데 앞장서야 할 정당의 대표가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대표야말로 ‘반문명적’이다.
– [필동정담] 그때 지하철 안에 있었다, 매일경제 김기철 기자 2022. 3.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