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적 조력 사망 헬렌-스카트 니어링 부부 선한 삶의 끝에서

적극적 조력 사망

자신의 의지로 비교적 적은 고통을 겪으며 죽기 위해 스위스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jtbc 뉴스룸이 현지에 기자까지 보내서 며칠에 걸쳐 조력 사망에 대해 보도했다. 우리 공동체도 조력 사망을 허용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어려운 문제다. 어려운 문제는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게 부작용이 적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나지만 자신의 의지로 삶을 마감할 수는 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이러한 죽음은 나쁘게 여겨지기 때문에 이에 대한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거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흉측한 방법을 쓰고 그 결과 보통 사람들이 떠올리는 자살도 대체로 끔찍한 모습들이다. 이러한 인식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게 의료인이 처방하는 약물을 통한 조력 사망이다. 사는 것도 힘들었는데 죽는 거까지 굳이 그래야 할 필요 있겠는가?

소극적 조력 사망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이simone weil는 폐결핵을 앓다 서른 넷의 나이로 죽었다. 겉으로 보면 그녀는 병을 앓다 간 거였지만 죽을 무렵 거의 먹질 않았어서 그녀의 죽음을 자살로 봐야 하는가 하는 논란이 있었다. 인간은 먹는 걸 중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 인간은 아플수록 이것저것 더 챙겨 먹지만 다른 동물들은 아프면 먹는 걸 멈춘다. 굶는다는 건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부작위다. 어쩌면 단식하여 죽는 것도 같은 선상의 연장으로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헬렌 니어링이 1990년 여름, 지금은 폐간된 in context​라는 계간지에 기고한 글이 있다. 나는 예전부터 니어링 부부 같은 급진주의자들의 성향을 좋아하지 않고 있지만 의외로 이들의 삶이 세상이나 자연과 불화하지 않고 조화로웠다는 것에 나의 생각을 돌아보기도 한다. 결혼하기 전 헬렌 노우뜨는 지두 끄리쉬나무르띠를 좋아했다고들 한다. 도통했다는 끄리쉬나무르띠가 색욕 따위에 관심을 두었을 리 없어선지 헬렌은 마음을 접고 스카트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이라는 사람과 결혼했고 이후 헬렌 니어링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활동이란 게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시골에 남편과 들어가 자급자족homestead하면서 살고 그런 삶을 글로 써서 내고 하는 거였다. 이들의 삶과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줬다. 지나고 보면 차라리 스카트가 그녀에게는 더 어울리는 배필이었다.

의사라면 약을 처방하게 마련이다. 스카트와 나는 함께 we practice health라는 책을 쓰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그 책에 담길 많은 내용들은 이미 living the good lifecontinuing the good life를 통해 여러 챕터에 걸쳐 소개되어 있다. 모두 홈스테드에 관한 책들이다. 우리는 진료를 받거나 약을 먹거나 병원 자체에 간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스카트는 건강하게 100년을 살았고 그가 가고자 한 때 갔다. 한 달 반 동안 곡기를 끊었다.

​그는 튼튼한 몸으로 나무를 벴고 정원을 가꿨고 집도 직접 지었다. 또한 맑은 정신으로 20대 이래로 90대까지 40권이 넘는 책들을 썼다. 그의 자서전인 the making of a radical을 포함해서 말이다.

​”일을 하면 잘 늙질 않아. 내게 일은 곧 삶이지. 일하지 않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고 재미있게 일하면 늙을 일도 없어. 희망하고 계획하지 않고 후회에 빠져 살면 사람은 늙어. 일하고 의미 있는 일에 관심을 만들어 가는 건 노화 예방에 아주 좋지.” 그의 말이다. 고요하게 그는 삶의 끝을 마주했고 흔들리지 않는 의식으로 직시했다.

​그는 1981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가능하다면 99살까진 살고 싶어요.” 이렇게 말할 때 그의 파란 눈은 반짝였다. “어림없는 얘기일 수 도 있다는 걸 저도 잘 알아요. 나이가 들면 표현도 인식도 서툴어지겠지만 시간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어쩌겠어요. 쓸모라는 게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살아 있고 싶어요.” 월트 휘트먼미국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기도 했다. “낡은 배는 많은 항해를 할 수 없지만 깃발은 돛대에서 펄럭이고 나는 여전히 키를 잡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60대가 되면 노화를 이야기한다. 스카트는 90대가 되어서야 늙기 시작했다. 그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누가 그에게 늙었다고 하면 나에게 한소리 들어야 했다. 그는 할아버지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시력이나 청각도 여전했다. 주름살이 많았던 것은 인정한다. 그것은 50대부터 뙤약볕 아래에서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일 뿐이지 노쇠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죽는 해까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제 몫 이상을 했다. 98살에도 “나 아직 도끼질도 하고 나무 짊어다 나를 수도 있다우.”라곤 했다. 죽음이 임박해서는 거실에 누워 나를 보며 이 육신의 땅에 남은 아쉬움 하나라면 저기 땔감에 튀어나온 삐죽한 가지라며 “저거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 했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일꾼이었다.​

그가 죽기 한두 달 전 식탁에서였다. “난 이제 먹는 걸 그만둘까 해요.” “그래요.” 나는 그렇게 답했다. “이해해요. 나도 그렇게 할 거 같아요. 동물들은 갈 때를 알죠. 조용한 구석을 찾아 자리하고 먹는 걸 멈추죠.”

​그래서 나는 스카트에게 주스를 먹였다. 당근 주스, 사과 주스, 바나나 주스, 파인애플 주스, 포도 주스 … 온갖 주스들을 먹였다. 목이 말라 할 때마다 마실 걸 충분히 줬다. 당연히 그의 기력은 쇠해졌고 간디처럼 말라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말했다. “나는 이제 물만 마실까 해요. 다른 것은 마시지 않을래.” 그러고 열흘 정도를 물만 마셨다. 그는 기력이 거의 다한 채로 침대에 누워 있기만 했지만 나와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 갔다. 1983년 8월 24일 아침 그가 100살이 된 2주 뒤 나는 그의 침대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가 막 떠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시끄러울 것도 없었다. 아무의 방해도 의사도 병원에 데려갈 일도 없었다. 나는 말했다. “다행이에요, 스카트. 잘 가고 있어요. 선한 삶을 살았고 우리가 일궈 놓은 것들 위에서 잘 마무리했어요. 계속 빛을 따라가요. 사랑하지만 가야 되요. 괜찮아요.”

​그의 부드러운 음성에는 떨림도 고통도 어떠한 걸림도 없었다. “다행이오.” 숨은 서서히 잦아들었고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가을 낙엽이 서서히 땅에 내려앉듯 그렇게 편안하게 육신을 떠났다.

​그는 긴 시간을 공공의 복리에 헌신하고 몸소 실천하며 산 뒤 창조주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평생을 흔들리지 않았고 전념했다. 그는 세상과의 사이에서 불화하지 않았다. 늘 조화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가 말한 대로 살았다. 그는 신념대로 살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양심에 거리낄 게 없었다.

​나 자신과 나의 노년을 보며 나는 그의 자취를 따르려 노력한다. 홀로 홈스테딩을 하는 게 쉽진 않지만 그래도 해 나가고 있다. 몇 해가 지나면 나 또한 그 커다란 경험을 하게 되겠지. 그의 반만큼이라도 선한 삶을 살다 좋은 죽음을 맞고 싶다.

선한 삶의 끝에서, 헬렌 니어링

필요한 준비

사람이 40년을 넘게 살면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잃기 시작하며 몸의 기능들이 퇴화되기 시작한다. 아무 준비나 의식 없이 이 시기를 부지불식 간에 맞게 되면 당황하게 된다. 그때부터 죽음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분명하게 내가 바라는 여행의 끝은 스카트의 그것과 같다. 단지 내 의지 외적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그저 열흘 남짓 함께해 줄 사람 한 명이다. 쓸쓸한 것도 쓸쓸한 거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진통제와 마약이 필요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의사의 도움을 받아 아마도 고통이 적을 것으로 추정되는 물질을 투약하여 목숨을 끊는 걸 적극적, 좁은 의미의 조력 사망이라 한다면 니어링 부부가 맞은 죽음은 소극적, 넓은 의미의 조력 사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적극적 의미의 조력 사망은 커녕 스카트 니어링의 이런 자연스럽고 평안한 죽음조차 우리 공동체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였다면 헬렌 여사는 감옥 신세를 지게 되었을 수도 있다. 우리 형법은 사람을 방조하여 자살하게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을 살게 한다. [제252조] 대법원의 판례에 따르면 이 조에서 말하는 ‘방조’란 조언이나 격려를 포함하여 적극적, 소극적, 물질적, 정신적 방법 등 모두를 포함하므로 헬렌 여사의 경우 빼도 박도 못하고 여기에 해당된다. [2005. 6. 10. 선고 2005도1373 판결]

마약 문제도 그렇고 조력 사망도 그렇고 사회적인 필요성은 분명히 인정된다. 공동체적 공감대도 충분히 형성되어 있다. 문제는 늘 그러하듯 악용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라는 거다. 간절하게 삶의 고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릴 위험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완벽한 건 없다. 너무 급하지 않게 조금씩 시도해 봐야 한다. 연명 치료 거부에 대해서는 큰 탈 없이 우리 공동체가 수용해 나가고 있다. 그 정도 용량은 되는 공동체다. 다음으로 소극적 조력 사망을 생각해 볼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