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군인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과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
미국을 도와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던 우리 국군들 가운데 일부가 전쟁 수행 중 베트남 민간인들을 집단적으로 죽였다. 이 살인으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가 우리 정부를 상대로 손해의 배상을 청구했고 우리 법원이 그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 사건에서 제일 중요한 쟁점은 우리 국군이 정말 베트남의 민간인들 여럿을 죽였는가 하는 거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부끄럽게도 부정하고 있지만 그 동안 꾸준하고 일관되게 있었던 피해자들과 실제 살인을 했던 가해자들의 증언과 이번 소송을 통해 우리 법정에서 밝혀진 사실들로 미루어 이 극악무도한 범죄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큰 이론이 없다.
민사 소멸시효의 완성 여부
불법행위가 있었다는 거와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건 서로 다른 문제다. 문제의 행위가 형사 불법행위라면 공소시효가 문제되고 민사 불법행위라면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문제된다. 인류애에 반하는 전쟁 범죄의 경우 공소시효를 부정하는 건 글로벌 스탠더드다. 그러나 최근 우리 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책임을 인정한 우리 법원의 판결은 형사 문제를 따지는 게 아니었다. 베트남의 피해자들은 자비를 베풀어 우리 가해자들에게 형사 책임은 아직 묻지 않고 있다. 이 사건에서 원고는 우리 정부에 대해 불법행위 책임을 묻고 그에 대한 손해의 배상을 청구했다. 이는 민사소송이었으므로 원고의 안타까운 사연과는 별개로 우리 법에 따른 소멸시효의 완성 여부를 자세히 따져 봐야 한다. 우리 법정에서 우리 법에 따른 손해의 배상 여부를 결정하면서 법이 정한 한계를 넘어 배상을 한다면 이 또한 불법행위이기 때문이다.
청구인의 장애에 따른 시효의 정지
우리 법원은 우리 정부가 주장한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을 인정하지 않고 청구인에게는 지나온 긴 시간 동안 이 사건 손해에 대한 배상 청구를 할 수 없었던 장애가 있었다고 했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들은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소멸시효의 완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기사를 냈지만 이는 틀린 주장이다. 형사 공소시효와 민사 소멸시효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다. 우리 법원 역시 판결 이유로 이 사건이 전쟁 범죄에 대한 거기 때문에 소멸시효의 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지는 않았다.
공소시효든 소멸시효든 몇몇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그 진행이 정지된다. 예를 들면 피해자가, 자신이 범죄 피해를 입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상황이었거나 설령 이러한 사실을 알기는 했더라도 그에 따른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던 경우 등이다. 이번 학살 사건에서는 후자의 경우가 부차적인 쟁점이었다. 원고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어서 수십 년 동안 손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없었던 걸까? 범죄가 일어난 장소는 우리나라와 먼 곳이라 사건을 규명하는 데에 우리 정부가 훼방을 놓았을 가능성도 작을 텐데 말이다. 문제는 베트남 정부였다.
베트남 전쟁은 흔히 베트콩이라고 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이기고 미국과 우리가 진 싸움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긴 전쟁에서 구차하게 진 나라들에 대해 이거 저거 따져 묻는 게 가오 상하는 일일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추상적이고 피상적이다. 우리 법원이 인정한 장애는 이런 게 아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베트남과 우리 사이의 정치적 입장이 원인이었다. 당시 베트콩 역시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진 않은 만행들을 많이 저질렀고 이렇게 덮고 싶은 사정에 더해 베트남 정부 역시 두 나라들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를 저어하여 사건 규명을 뭉개 왔다. 이게, 우리 법원이 소멸시효의 정지를 인정한 이유가 된 청구인이 겪은 장애였다.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이 권리남용이 되는 경우
신의성실의 원칙과 권리남용 금지의 원칙은 우리 법의 대원칙이다. 소멸시효가 완성되어 채무를 이행하지 않겠다는 채무자의 항변 역시 이 원칙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우리 법원은 확고하게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은 권리남용이 아닌 범위에서만 인정하며 그 한계를 벗어난 경우에는 소멸시효의 완성을 이유로 하는 항변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이 권리남용이 되는 걸까? 바로 이번 사례처럼 청구인에게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장애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무자가 이러한 항변을 하는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다.